5층, 달빛, 소녀와 기린, 지게차의 공회전 우화
장거리 여행자의 외출처럼 현관 비밀번호를 바꿨다가
어쩌다 막차를 타고 돌아와 보니
패스워드가 풀리지가 않아요
하이힐은 시든 꽃처럼 꺽였어요
열쇠가게 주인은 잠이 들었어요
자정이 넘으면 열쇠가게 주인은
이 세상 밖에 있대요
푸른 새벽보다 먼저
5층으로 가고 싶어
이 세상의 또 다른 파수꾼을 깨워요
지게차 소리 요란하고
나는 어쩌다 비밀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됐을까요
기린의 목에 매달려
5층을 넌지시 가늠해요
지게차 아저씨는 괜찮다고 해요
짐짝 대신 나는 밤의 순수한 재물로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어요
아저씨, 이게 최선인가요?
아저씨는 그런데 잠에서 깬 열쇠가게 주인 같기도 하고
동물 조련사 같기도 하고
서커스 단장 같기도 해요
또 아빠 같기도 해요
콧수염을 떨어뜨린 대신
가발을 쓰고 나온 소심한 파수꾼
그는 말수가 적어요
나는 공중그네를 잡고 있어요
어디로 뛰어내릴지 모르면
달을 잡으래요
그러다 달빛마저 놓치면
어린 시절의 놀이터를 열심히 마음 속에 그리래요
그러면 어느새 덤블링을 하고 있는
5월의 꼬마 아이를 본대요
5층에 다 왔어요
그런데 창문으로 내리기 전에
안을 슬며시 들여다봐요
그 안에 누가 자고 있나 보려구요
내가 자고 있는 모습 보이면
어떨까 해요
나를 깨워야 하나요
그럼 나는 안심하고
달의 얼굴이나 곱게 세안하고
눈곱이라도 보일라치면 떼어주고
남들이 모르는 달의 뒤편이라도 훔쳐보고 내려오면 되나요
하지만 나는 없겠지요
나는 이렇게 높고 외롭고 허전한데
또 다른 나는 없겠지요
기린이 간지러운듯
머리를 흔들어요 현기증에 흔들려요
푸른 새벽이 발 끝에 스며들고 있나봐요
거의 다 왔어요
샛눈을 뜨고 창문에 손을 내밀어요
창가에 입김이 서려요
거기에도 달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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