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9일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라떼



English Breakfast Latte


“설마”


그는 동아리 후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 작품을 그 녀석이 그린 거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
“네”
“야, 너 많이 컸다. 거짓말도 슬슬 하고.”
“아니에요. 선배. 진짜래도요.”
“장난 그만 쳐라. 차라리 내 마누라가 외계인이라고 해.”


“정말이래니까요.”
“야, 잘 봐! 이 우아한 목선, 이마의 광채, 완벽한 조화와 무질서,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눈으로 먼저 의사를 전달하는 단호함, 섬세한 리듬감 속에 절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한 여유와 우아함. 이걸 그 놈이 그렸다고.”
“네.”
“그 우유부단이, 그 머저리가, 그 촌뜨기, 얼뜨기가, 녀석은 우유부단한 히키코모리에 불과했어. 자취방에 웅크리고 앉아 명랑만화 혹은 망가에 열중하던 놈, 신문에 퍼즐 퀴즈나 풀던, 아직도 태권브이를 숭배하는, 교양수업 과제도 힘겨워 하던 놈이었어. 나는 그 놈이 그린 커튼을 아직도 기억해. 2년 동안 자기 집에 있다던 그 노란 커튼, 너도 알지? 교수들도 답이 없어 그냥 방치한 놈이 바로 걔라고!”
“그건 벌써 7년 전에 일이잖아요.”


자 다시 봐! 이젠 하이퍼 리얼리티까지 어느 정도 담론이 끝난 지금, 이 그림의 숭고함을 말야. 빌 비올라의 종교성은 없지만 그를 뛰어넘는 숭고함이 여인을 감싸고 있잖아. 이런 고전풍의 미인을 이 시대에 그리다니! 회화사와 정면승부를 걸 수 있는 배짱있는 위대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거잖아. 녀석은 애초에 불가능했어. 회화사가 뭐야! 동네 미술학원에도 통하지 않을 그림들, 아니 그리지도 못했어. 벌벌 떨었지. 졸업하고 미술학원도 선생짓도 못할 놈이란 말야. 어디서 복제나 하면 모를까? 아니면 만화 견습생 정도나 어울리지, 암~”


“선배가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 몰랐는데, 이미 이쪽에선 난리도 아니에요. 평론가들은 우식 선배의 재능을 높이 인정하고 한국의 차세대 젊은 거장이란 말까지 쓰고 있던데요. 기자들은 특집 기사를 냈고요. 저도 기사보고 알았다니까요.”


“경박한 것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호들갑이군.”
“동기들이 그러는데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대요. 그 선배 만난 사람들이 다들 그래요.”


“너, 언제부터 그 녀석을 선배라고 불렸냐?”
“선배니까, 선배지요.”
“내참, 어이가 없어서.”
“그럼, 선배! 내일 저랑 전시 가보실래요. 낼부터 우식 선배 전시래요. 현대 갤러리에서요. 동기들이랑 모임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가보려고요.”


“지금 거기 리모델링 하지 않나?”
“얼마 전에 끝내고 우식 선배 전시를 계기로 오픈행사를 대대적으로 한대요. 한 번 가봐요. 가서 확인해 보시고 직접 이야기도 나눠 보세요.”


“내가 왜?”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믿으실 것 같아서요.”
“아니 전시는 됐고, 그 녀석 전화번호나 불러봐!”


그는 다음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파리 8대학에서 미술사 박사 과정 중에 있는(지금은 경제적 사정과 지도교수와의 갈등, 그리고 연구 과제의 스트레스로 1년 정도 휴학을 선언하고 국내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학 내내 장학생이었고, 교수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그는 끝내 화가의 길이 아닌 이론가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는데, 그의 눈에 늘 한심했던, 말과 행동이 느리고 예술적 기지나 재능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던 동기 우식의 이런 변화는 뜻밖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후배가 일러준 우식의 전화번호를 의미심장하면서도 다소 다급한 동작으로 눌렀다.


“야, 우식이, 누구긴 누구야.  나 민기, 이민기”
그는 상대방의 말을 거의 무시하는 듯했다.


“그래 반가운 건 됐고, 내가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요즘 너 무슨 차(茶) 마시고 있냐?”
...
“됐고, 너 요즘 무슨 차 마시고 있냐고? 그것만 말해봐 "
...
"정말이야? 정말 그렇다고?”
...


“알았어.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후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유학파 선배를 쳐다보았다.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선배는 무엇이 불안한지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탁자를 계속 두드렸다. 보이지 않는 자판을 계속 누르는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선배, 무,  무슨 차를 마신대요?”
“몰라, 야! 너 찬물 한 잔만 가져와라!”


후배가 시킨 대로 자리를 뜨자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혼잣말을 했다.


“뭐, 잉글리쉬, 잉글리쉬, 잉글리쉬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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