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0일

그녀의 타이어





그녀의 타이어


1


처음으로 그녀가 달라보였다. 다들 그녀가 매력 있다고 난리였지만 그만큼은 오른손 검지를 밉살스럽게 흔들며 아니라고 자부하곤 했다. 그런 그녀가 자정이 다 된 시각에 교양 없이 전화를 해 다짜고짜 이런 날은 술이 최고라며 그를 불러냈다. 시장 귀퉁이 포차에서 족발에 소주 원샷, 원샷 원샷~


역시나 금세 술에 취해 그녀는 돌연 투정 많은 어린 아이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추하지 않았고 도리어 사랑스러웠다. 어린 시절 발레를 했다느니 뭐니, 첫사랑의 1절, 2절에 도취되어 코를 찡긋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예전에 볼 수 없는 여자를 발견하고 적잖이 당황했다. 어쩐지 처량하게 눈썹으로 자꾸만 미끄러지는 긴 머리가 신경이 쓰이기까지 했다. 주저하며 쥐었다 폈다 하는 손에서 정전기까지 일어났다. ‘왜 이러지? 미쳤나’


윤기는 없었지만 고개를 숙여 알 수 없는 푸념을 늘어놓는 그녀도 알고 보면 꿈이 많았던, 많을 걸 포기하며 살아온 여자가 아닌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개구리가 울던 시절이 좋았지? 그지! 개굴개굴개굴개굴~”


남성편력이 심한 그녀. 100일이 넘는 긴 연애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외치는, 자기는 꽤 소박한 연애만 원한다고 구찌와 루이 뷔통을 흔들어대는, 클럽의 사이키 조명 아래에 있을 때 가장 섹시하다는 자뻑녀, 클럽 죽순이, 테크노 리듬의 여왕, 연하남 킬러...


술에 취해 그녀는 만났을 때의 어둠과 근심을 모조리 걷어내고 요정처럼 가벼워져 그의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집에 가서 2차를 하자, 구호를 외치며 걸어가는 대책 없는 선장. 당장 어떤 나라도 정복할 수 있는 장군이었다. 다만 따르는 병사가 없을 뿐이었다. 그녀의 자취방은 학교에서 멀지 않았다. 길을 안내라도 하겠다는 요량으로 그와는 10미터 정도 앞에서 걸어간다.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용케도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남들이 볼 수 없는 외줄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걸었다. 그는 굳이 잡아주지 않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부축을 해줘야 했건만 혼자 연습을 해야만 하는 서커스 신참단원의 오기가 발동할 것만 같아 지켜만 봤다.


그러다가 결국 언덕의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꽈당, 그녀는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자기의 몸개그에 웃기만 했다.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 웃음은 이내 어색한 침묵이 됐고 그녀는 그에게 도발적으로 키스를 했다.


희미한 전봇대 아래에 키스.


그는 반사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공중에 멈춘 두 손은 그녀의 어깨에서 허리로 천천히 착륙해 내렸다. 그녀가 먼저 입술을 뗐다. 그녀가 먼저 둘만의 공간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그 공간에 멍하니 남아 있었다. 잠시지만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그는 순간, 공허하고 아득했다.


여자가 그를 부른다
여자가 그를 부른다
여자가 그를 부른다


“이것 좀 들어줘!”
“이건 왜?”


버려진 타이어였다. 신발보다 싸다는 폐타이어.


“굴려보자”
"진심이야?"


버려지니 타이어를 보고 무슨 충동에서인지 악동 기지를 발휘한 그녀였다. 무슨 주사인가?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고 그를 불렀다. 기꺼이 공범이 되기를 강요했다. 그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스즈미야 하루히가 따로 없었다. 타이어를 조심스럽게 옮겼다. 물을 먹어 타이어는 보기 보다 무거웠다. 그녀는 2차선 도로 위에 과속 방지턱을 육상 트랙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출발 선상에는 그녀와 타이어만 놓여 있었다. 그녀가 입으로 ‘탕’소리를 내자 타이어가 구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망아지의 엉덩이를 걷어차듯 타이어를 걷어차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이어가 무심히 굴러갔다. 속력을 내더니 구형 소나타의 후방 측면부와 부딪혔다. 그는 순간 두 손으로 눈을 가렸고 그녀는 신기한 듯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의 경보등이 어둠과 고유를 깨고 달동네의 평화를 빼앗고 있었다.


“뭘해? 뛰어”


두 사람은 허겁지겁 뛰어야만 했다. 당장이라도 경찰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2


햇살이 커튼을 뚫고 두 사람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들어 있었다. 베개 대신 타이어를 베고 있었다. 이불을 챙길 여력도 없었는지 서로를 껴안고 있는 잠든 두 사람. 먼저 눈을 뜬 건 집주인인 그녀였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시커먼 남자와 타이어!


“이건 뭐야? 당장 일어나" , “너는 여기 왜 있어!”, “너 미친 거 아냐”...


그의 머리 위로 계속 망치가 내리치는 듯했지만 무슨 말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 먼지 봐! 이 괴물, 어서 당장 나가.”
그녀의 속사포 같은 말에 대꾸하기 위해 그는 문장을 찾아야만 했다.


(‘니가 어제 타이어 옮겨 달래매.’ ‘이런 게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버리자고 내가 충고 얼마나 했는 줄 기억은 나니?’ ‘이거 계단으로 들고 오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하지만 아무 말도 대꾸하지 못하고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형체가 아직도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우선 잠부터 깨야했다.


“몰라. 몰라! 난 암튼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어. 당장 나가. 이 타이어 가지고 나가라고! 나 이따 약속 있단 말야.”


그는 수집한 문장들은 그대로 남겨 두고 한 마디만 하고 방을 나와 버렸다. 물론 타이어도 옆구리에 끼고 말이다.


“너, 진짜 돋는다 돋아!”





3


-일주일 뒤-


캠퍼스의 오후, 그녀와 그의 만남


“야, 너 도너츠 몇 개째야? 진짜 잘 먹는다. 어제 굶었니?”


“내가 도너츠를 좀 좋아해”“좀 좋아하는 게 아닌데~”“사실 도너츠 킬러야. 언제든지 도너츠라면 뭐, 자신 있어. 내 꿈이 뭔지 알아?”


“뭔대?”


“세상에서 젤로 큰 도너츠를 먹는 거야. 타이어처럼 큰 도너츠 말야. 진짜 황홀할 것 같지 않아.”


“...”


“이 모양을 봐. 원 안에 원,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 이 완벽한 구조 속에 설탕가루~”


그는 어쩌면 그날 밤의 그녀의 기행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방금 본 그녀의 눈빛과 그날 밤의 눈빛은 정확히 일치했다. 어쩌면...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날 밤 그녀와 자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타이어가 그를 살렸다.





댓글 2개:

  1. 아하하 방안에 타이어라; 전 타이어만한 도너츠는 관심없지만 꼬맹이 키만한 붕어빵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바스키아 영화를 봤는 데 바스키아가 타이어에 그림을 그렸어요 뜬금없이 생각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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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바스키아도 타이어 매니아였군. 커다란 붕어빵도 만만치 않은 공포인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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